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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쉬운 서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자신은 없다. 기본적으로야 내가 읽고 내용을 거진 이해했다, 내 언어로 고쳐서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면 쉬운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지금으로서는 주관적인 기준밖에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름대로 이 정도면 객관적이 될 거라고 제시할 만한 기준이 있기는 하다.

첫째,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정도, 그러니까 한국에서 12년 동안 초중등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사람이 읽고 이해하기에 무리가 따르지 않는 글이면 '쉬운 서술'이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그런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 교과서는 알파와 오메가일 수밖에 없겠고, 그 알파와 오메가 안에서 성적으로 모든 게 완결되어야 한다는 교육의 폐해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허덕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원래 교과서란 '오메가'의 위치에 서서는 안 되며 출발지점에 해당하는 책이다. 교과서를 다 읽고 이해했다면 교과서 밖의, 연관된 다른 책들로 나아가게 하는 일종의 디딤돌 같은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러므로 교과서를 읽고 다 이해한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는 글. 그 정도가 지금으로서는 '쉬운 서술'을 나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닌가 한다.

여담이지만 방송 프로그램의 언어는 대개 중학생 정도에 맞춰져 있다고 한다. 그 정도 수준이 더 쉽다고 할 수 있겠지만 중학생을 내가 기준으로 삼지 않는 건 중학생의 교과서는 고등학생이 읽을 만한 글이나 책의 출발점으로서 아무래도 고등학생들이 보는 책보다는 문장 수준이나 개념 등이 많이 간략화되고 축소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셋째도 써야 할 것 같지만 아직 여러 가지로 고민중이다...)

한국의 초중등 교육과정은 일단 진입했다가 나오는 순간 책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지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그야말로 소위 '연구' 체질을 개발했다기보다 타고난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자면 약간 공부를 잘했든, 아니면 아예 공부를 못했든 책은 웬수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지식사회의 일원들은 정규 교육 과정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어 공부의 길을 택했다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자력갱생한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 속한다(애초에 정규 교육 과정이 공부에 대한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게 설계되어 있지도 않다). 이 사람들은 체질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을 웬수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식수준,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문체 수준 등에 대해서는 딱히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소위 인문학 지식을 쉽게 설명했다는 대중교양서의 상황은 날로 악화하는 것 같은데도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결과는 논문의 축약판이거나 신문, 잡지의 칼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의(때로는 이 두 형태의 혼종도 있기는 하다. 그 혼종에 익숙한, 읽는 사람만이 읽는다) 글만이 '대중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어느 쪽의 필자든 '시대와 사회에 대한 각성'조차도 타고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 그 글들은 어설픈, 그리고 씨알도 먹히지 않는 '계몽'에 그치고 만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렇게 해서 상황은 점점 더 악화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치를 떠는(나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글을 살펴보겠다. 이런 유의 글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생각해봐야 할 지점들을 드러내준다. 

사실문제/권리문제

[ 事實問題/權利問題 , Quaestio facti/Quaestio juris ]

칸트가 범주의 객관적 실재성의 증명을 '초월론적 연역'이라는 형태로 수행하고자 할 때 '연역'의 목표를 명시하기 위해 도입하는 법학적 개념. 칸트에 따르면 법학자들은 합법성과 권한에 관한 문제를 단지 사실에 관한 문제로부터 구별하여 '권리문제'라고 부른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은 순수 지성 개념의 소유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지성 개념을 사용하는 권한의 문제, 다시 말하면 선험적 개념의 경험에 대한 적용 가능성의 근거에 관계한다. 이 문제는 『순수이성비판』의 성립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경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실문제/권리문제 [事實問題/權利問題, Quaestio facti/Quaestio juris] (칸트사전, 2009. 10. 1., 사카베 메구미, 아리후쿠 고가쿠, 구로사키 마사오, 나카지마 요시미치, 마키노 애이지, 이신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12804&cid=41908&categoryId=41954

물론 이 칸트사전은 일본에서 일본의 연구자들이 대체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출간했기 때문에 서술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 문장들은 번역된 것이지만 경기를 일으킬 만한 철학적 개념과 문장의 '근본 출처'가 바로 일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고 본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고 또한 안타깝기는 하지만 인문학의 많은 개념들은 일본에서 번역한 것들을 그대로 음독하여 들여왔다. 이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조금 더 쉬워 보이기는 하나 역시 어려운 글 하나를 더 살펴보자. 

그는 자기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발생적 문제(사실 문제)를 다루지 않고 인식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 권리 근거를 다루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권리 문제)를 사용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87524&cid=41978&categoryId=41985

이는 한국의 저자들이 쓴 <철학사전>에 나오는 '권리문제' 항목의 일부분으로서 전체를 다 읽어도 역시 이게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와 같은 비전공자, 또는 철학에 관심은 있으나 사실상 고등학교 졸업생 수준의 철학 지식만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을 때, '권리문제'를 이해하게 해줄 출발지점과 중간고리와 같은 글은 어디서 찾아봐야 하나? 처음부터 이런 식의 문장만 읽으면서 이해하려고 기를 써야 하나? 이것이 내가 많은 학술서를 읽으면서 느낀 좌절감이고,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오래도록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 무식한 이가 무식을 벗어나려 하나 그저 헤매는 상태만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제 첫번째 글만큼 어지럽지는 않지만 역시 어려운 글 하나를 더 인용해보겠다.

오늘날의 내이션과 직결되는 듯한 최초의 사건은 경험적인 시간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건으로서 설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내이션의 기원은 우주 그 자체의 기원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내셔널리즘의 상징이란, 기원이라고 간주된 그 사건이 경험적인 실재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물인 것이다. 기원의 사건을 우주론적인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 즉 그것을 역사적인 것으로서 경험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내이션이라는 정체성의 자각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 내이션을 다른 내이션으로부터 구별하여 특징짓는 것은 단지 그 내이션이 체험해온 역사의 특수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인문학 연구자'의 에세이(누군가의 고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에쎄)라고 볼 수 있는 글이다. 내이션은 뭐고 최초의 사건은 무엇이며 경험적인 시간도 뭔지 모르겠는데 그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건이란 또 무엇인가? 내이션의 기원이 우주 자체의 기원과 동일시되지 못한다는 말은 또 뭔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내셔널리즘, 민족주의가 궁금해서 우연히 책을 집어들었더라도 곧장 집어던지게;;; 만드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의 저자를 폄하하려고 인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런 내용과 문체 수준을 구사하는 '인문학자'는,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평생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번 개인이 갖게 된 고유한 문체라는 건 어마어마한 노력 없이는 무척 바꾸기 어렵다. 십수 년의 공부를 거쳐 이제야 자신의 글을 쓰게 된 사람들이 이를 포기하고 '대중적' 문체로 나아가자는 결심을 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딱히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조차 무척 드물다는 사실은 슬프다. 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작업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공부를 남과 나누지 못하는 이기적인 길을 간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려 하지 않지만, 많은 이들과 자신의 공부와 생각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그 나눔의 길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려 하는 노력조차 결여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내 판단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칸트의 권리문제에 관한 어떤 서술을 살펴보겠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중에 칸트가 사용한 용어로 말하자면 '사실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놓여 있는 것은 '권리문제'입니다.

'권리문제'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X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를 논의한다고 해봅시다. 이때 예를 들어 지금 X가 존재한다면 X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지금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존재한다 하더라도 '어째서 X가 가능한가'를 논리적으로 질문해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권리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로크도 홉스도 상응하는 사회 질서가 있다는 실제 문제는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은 본래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는 자유롭지만 실제로는 온전한 자유가 발휘되지 않고 상당히 억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홉스의 관점에서는 '생존권을 완벽히는 행사하지 않는다'라고 보았고 로크의 관점에서는 '더 일어날 만한 분쟁이 소거되어 있다'라고 보았습니다. 즉 논리적으로는 일어나야 하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가 바로 '권리문제'입니다. 일종의 비유적인 법률 용어입니다만 논리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논리적인 이유에 대한 개념입니다.  

맨 위의 '권리문제'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와 이 설명을 비교해보기 바란다. 물론 이 마지막 인용문은 앞의 맥락을 보면 더 잘 이해되지만 일단은 용어를 설명하는 방식을 살펴봤으면 해서 일부러 뚝 떼어왔다. 백퍼센트 이해가 다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권리문제'가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논리적으로(실제에 반대되는 개념의 '논리'. 원서에는 '논리적'으로 되어 있지만 '논리상'이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질문하는 것이며, 논리상으로는 일어나야 하는데도 왜 실제로는 안 일어나는가를 논리 차원에서 따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첫번째와 두번째 인용문에서 얻을 수 있는가? 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생뚱맞게 끼어 있는 세번째 인용문을 가져온 이유는 이렇게 전형적인 인문학 에세이를 쓴 사람과 마지막의 '해설'을 쓴 사람은 동일 인물이기 때문이다(오사와 마사치, 위는 <내셔널리즘의 역설>, 아래는 <사회학사>에서 가져왔다). 아래의 책은 강연 형식을 띠고 있는데 어려운 문장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뛰어난 개론서, 입문서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한번 성숙한 문체를 갖게 된 사람은 좀처럼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벗어나 이렇게 쉬운 서술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층위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의 수가 적은 것도 아니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런 글을 발견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로 일본어를 공부한 보람을 느낀다. 

첫번째 인용문과 같은 괴상망칙한(?) 문장의 원 출처가 일본임은 명백하다. 그리고 한국의 인문학 연구는 도리없이 그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념을 번역해 만들어본 적이 없고 그대로 가져왔으며, 그러한 번역-창작의 역사가 없는 데다 이를 도입한 역사도 일본보다는 일천하므로 개개인의 연구 역량과는 별도로 이 개념들을 한국어로(!) 소화해 다시 재진술할 역량도 전체적으로 부족한 게 아닐까라는 게 내가 세우고 있는 가설이다. 그렇다면 다시 원 출처로 돌아가서 그들은 어떻게 소화하고 재진술하는가라는 힌트를 얻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나 자신의 '출발지점'이 될 만한 책을 얻을 수 있고 그게 다시 다른 책들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인문학 연구자들에 대한 비하도, 부정도 절대 아니고 나 자신의 머리와 노력이 불충분함은 늘 인정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러한 출발점과 중간 고리들을 아직까지는 한국에서는 거의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