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와 침묵이야말로 가해자의 첫번째 방어책이다."
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는 망각을 조장한다. 가해자는 할 수 있는 것이란 다 한다. 은폐와 침묵이야말로 가해자의 첫번째 방어책이다. 은폐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해자는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다면 그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가장 뻔한 부정에서부터 가장 정교하고 고상한 종류의 합리화까지 일련의 인상적인 논쟁을 늘어놓는다. 잔학 행위 이후 우리는 비슷하고 뻔한 사과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 피해자가 과장을 한다, 피해자가 초래한 일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든 이제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가해자의 권력이 크면 클수록, 현실을 명명하고 정의하는 그의 특권은 더욱 커지고 그의 논쟁은 더 완전해지고 강해진다.
_주디스 허먼, <트라우마>에서
이제는 상식선이 되어버린 이 책의 이 내용을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은폐와 침묵'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그녀는 사실 피해자가 아닐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말을 교묘히 흘리고, '그녀의 기억이 달라져 있다'라며 신뢰성을 공격한다.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귀한 돈의 용처를 묻자 그런 걸 다 따지는 시민단체가 어디 있느냐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낸다(은폐하겠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에 대한 속시원한 해명은 여지껏 제대로 나온 게 없다. 오히려 파면 팔수록 회계상의 숫자가 자꾸 오류가 나는 걸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삼십년 세월을 이렇게 허망하게 날리나 싶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돈과 가족 문제는 당사자인 가족들을 가장 단단하게 연결해주는 고리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외부의 공격에는 가장 취약한 고리이기도 하다. 작년 여름 조모 사태에서 보았듯이 이들 문제가 투명하지 못하면 그가 과거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든 간에 모든 업적을 한방에 날려버릴 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유리지갑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로 공격을 받을 일이 없다. 수입이 뻔하고 지출도 뻔하며 탈세 같은 걸 시도했다가는 무슨 징벌이 날아오는지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그런데 소위 지도층, 운동가, 활동가 가운데에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회계감사며 국세청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는 게 참으로 묘한 일이다. '정의'의 편에 서면 모든 국가기관 권력기관이 발밑에 엎드리기라도 해야 하고 만천하가 다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줘야 한다고 믿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필부필부가 알고 있고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상식선이 그들에게서 자꾸 어그러진다는 게 신물이 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과는 별도로 누군가가 양심선언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활동과 그에 따른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못하는 집단은 다시 지지할 일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