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

이휘영 페스트 번역본에 대한 단상

Gigi_지지 2020. 6. 17. 06:26
페스트 - 8점
알베르 카뮈 지음, 이휘영 옮김/문예출판사

 

이휘영 번역본으로 <페스트>를 읽은 이유는 이용 중인 독서 앱에서 읽을 수 있는 번역본 가운데 꽤 믿을 만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사실 이휘영 선생님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지만(내 세대가ㅡ아니 어쩌면 그 아랫세대들도ㅡ이름을 알고 신뢰하는 프랑스문학 번역자로서는 김ㅎㅇ, 이ㅅㅇ, 황ㅎㅅ 선생님 등을 들 수 있다...) 괄호 안 번역자들의 스승뻘에 해당하는 분이라는 걸 찾아보고 나서 이 번역본을 선택했다. 

 

이 책에 실린 이휘영 선생님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소르본대학교 문학부에서 D.S.C.F. 학위를 획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전락》, 《페스트》, 《안과 겉》, 로멘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사전꾼들》, 르 클레지오의 《홍수》 외 《카르멘》, 《독서론》, 《회색 노트》, 《암야의 집》 등이 있다.

이미 작고하신 분인데 생몰년도 나와 있지 않고(이유가 뭘까?), 띠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문학의 거장'의 약력으로서는 좀 소략하지 않나 싶어서 다른 약력을 찾아보았다(게다가 잘못 쓴 부분도 있다. '로멘 롤랑'이 아니라 '로맹 롤랑'이다. 로맹 가리의 그 로맹이다...;;;) 

 

두산백과 '이휘영' 항목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5881&cid=40942&categoryId=39727

 

이휘영

한국 최초《불한사전》을 편찬한 선구적 불문학자.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교류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서울대학교 교수, 프랑스 소르본대학교 초청연구교수를 역임했다.《대학불어》,《에센�

terms.naver.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휘영' 항목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6691&cid=46615&categoryId=46615

 

이휘영

해방 이후 『불한소사전』, 『엣센스 불한사전』 등을 저술한 학자. 불어불문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호는 서농(西儂). 평양 출신. 1939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수료하고, 1944년 도쿄 아�

terms.naver.com

위의 두 항목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이분이 일본 메이지대학과 아테네 프랑세에서 수학하신 분이라는 점, 그리고 카뮈의 <이방인>을 '동양 최초'로 번역한 분이라는 점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 유학을 간 분들은 일본어를 잘하실 수밖에 없다.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런 분들의 학문세계의 형성은 '일본의 학문세계'와 분리할 수 없으며 이분들의 어휘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맨 위의 약력이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듯이(이미 작고하신 뒤에 나온 책이라 당신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실들은 해방 이후 학계에 진출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데 필요했으면서도 감춰야만 하는 이중구속으로 기능해왔다. 이분들의 번역도 일본어에 영향을 받았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나 이 역시 다들 알면서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의의를 밝히는 작업은 아직도 많이 소홀하지 않나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과정의 일단을 쫓아가보고 싶다. 이런 작업은 절대 부끄러운 역사를 들추고 그분들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 맞닥뜨린 상황 중 아주 작은 장면이라도 꼼꼼히 들여다보고 싶어서이다. 그분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고뇌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 없이 지금의 한국어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선 첫번째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동양 최초 이방인 번역'에 대해서 조사해보았다. 몇 군데의 대학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검색해본 바로는 이 번역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일본 최초의 <이방인> 번역본은 1951년 6월에 나온 구보타 게이사쿠의 번역인데 '동양 최초'라는 말이 맞다면 최소한 그 이전에 번역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국가도서관에서 검색해본 바에 따르면 검색되는 <이방인>의 가장 오래된 중국어 번역본은 1981년도판이었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휘영 번역본 이방인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1953년도판이다. 1949년에는 <기초 불란서어>, 1950년에는(전란 직전이거나 전란의 와중!) <베토벤의 생애> <회색 노트>가 출판되었다. 1951년과 1952년은 출간된 책이 없으며 전란의 와중이었으므로 책의 출판이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한다. 하지만 '동양 최초'라고 했으니 어느 잡지에 연재했을 수도 있고, 번역은 되었으나 출판이 불가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는 아쉽게도 확인해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확인 가능한 이휘영 번역본 <이방인>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여러 도서관의 교차검색 결과로 보아 1953년도판이 거의 확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접근해보는 건 어떨까? 이분은 일본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프랑스어만큼이나 일본어가, 아니 어쩌면 수많은 어휘나 개념이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익숙한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분은 일본어 번역본을 당신의 번역에 참고하지 않았을까? 2012년도에 나온 <페스트>를 읽다가 이런저런 단어와 문장에서 이분이 혹시 <페스트>의 번역에도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조금 뒤져보았다. 이 2012년도판 <페스트>의 원형이라고 생각되는 첫 번역본은 도서관 검색에 따르면 1960년도 정음사판이다. 단행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페스트>의 판본은 1950년 미야자키 미네오의 <페스트 (상)>으로서 현재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신초샤의 문고본 <페스트>의 초판본으로 짐작된다. 신초샤 문고본 <페스트>는 1969년에 출간되었고, 신초샤 홈페이지에 가면 첫머리 부분을 미리보기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미리보기와 2012년도판 이휘영 번역본 <페스트>의 구절들을 대조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번역본은 중역이라고 보기에는 어휘의 순서 등이 상당히 세심하게 번역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어를 그대로 읽은 게 아닌가 싶은 몇몇 단어들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서해대책과 

: 쥐 때문에 생기는 피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실현하는 관공서 부서 이름이다. 

 

호치통신사

: 이휘영 번역본에는 '랑스도크 통신사'라고 나온다. 신초샤 번역본에는 '호치'에 '정보, 자료제공, 모든 문제에 관한 모든 정보'라는 역주가 붙어 있다. 이휘영 번역본에는 '통신사'에 '정보나 자료 수집 등 모든 문제에 대한 정보의 수집을 담당'이라는 역주가 붙어 있다. 

 

'25일 하루 동안에 6231마리의 쥐가 수집되어 불살라졌다고 보도하기에 이르렀다'(개인적으로 한 번역)

: 이휘영 번역본ㅡ25일 하루 만에 6231마리의 쥐가 수집되어 불태워졌다고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열병 광장

: 군사들을 열병하기 위한 광장 

 


다음은 약간 아리까리하지만 개정을 거듭하면서 요즘 용어로 바뀌지 않았나 싶은 단어이다 

 

청혈제

: 피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약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용어이다. 일본어판에는 '정혈제'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정혈'이라는 용어는 있어도 '청혈'이라는 말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는 요상함을 발견하게 된다. 표준국어대사전 제1판은 1999년에 발간되었고 개정을 거치기도 했으므로 이전에는 '정혈제'라고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정혈제라는 말도 예전부터 쓰였는데, '의학검색엔진'에서 신초샤판에 나오는 '정혈제'라는 용어를 검색해보면 '옛 대한의협 3 의학용어 사전'에 실렸던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의학용어집은 1977년도에 제1집이 나왔다. 위의 '3'이 제3집이라고 했을 때 1992년까지도 '정혈제'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휘영 번역본 초판에는 '정혈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림프샘

: 지금도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임파선'이라는 용어이다. 림프선이라고 할 때도 있다. 역시나 초판에는 일본어 번역본에 있는 것처럼 '임파선'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조는 하지 않았으나 일본어의 영향임이 명백한 단어

 

현청

: 여기서의 '현'은 가나가와현, 구마모토현 등 일본의 지자체 단위와 똑같은 한자를 쓴다. 한국으로 치면 가장 비슷한 단위는 '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프랑스에는 '도'가 없으며 대신 '주'가 있다. 재미있는 게 책 첫머리의 '오랑'에 '알제리 북서부 오랑 북부의 주요 도시'라는 주가 붙어 있다. 그렇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단위를 보통 '주'라고 부른다. 1950년 일본어 번역본의 초판에서는 '주청'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고, 현청은 사람들이 다 아는 말이니까 '현청'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의 감각으로는 아주 많이 어색한 단어다. '주청' 혹은 이게 어색하다면 '주 청사' 정도가 적절한 말일 것 같다.

 


그대로 읽어온 건 아니지만 흥미롭다고 생각한 단어

 

해수병

: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은 사람도 많을 텐데, 일본어판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단어가 나와 있다. '천식'이다. 한국에서 문학 번역으로는 매우 권위 있고 책을 잘 만드는 출판사의 2015년도 번역본에도 이 '해수병'이라는 어딘지 고색창연한 단어를 쓴 걸 확인했다. 

 


 

그 외 몇십 년은 되었을 듯한 문장의 흔적들

 

"그리고 내가 알아낸 것은 그 부부 사이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고, 어머니는 그저 체념의 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어머니는 용서해줄 수 있었습니다."

 

"1월 25일까지는 모든 사람이 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쎄요. 휴가를 얻을까 합니다만" 하고 판사가 말했다.

"정말 좀 쉬셔야죠."

"그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시 수용소로 돌아갈까 합니다."

 

"선생은 그렇다고 가상하시는 데 불과합니다."

 

"코타르는 늘 매우 자유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재화(災禍)"

: '재난과 화'라는 뜻으로서 요즘 단어로 치면 '재앙'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 역시 일본어의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대조한 부분에서는 일단 이 단어가 나오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었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코로나 사태'를 '코로나화(), koronaka'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단어

 

'페스트'

 

페스트는 알다시피 '흑사병'이다. 왜 책 제목을 '흑사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La Peste라는 제목을 '페스트'로 굳이 번역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시절에도 '페스트'와 '흑사병'이 언중들 사이에서 동일한 비중으로 사용되었던 것일까...? '흑사병'의 '흑사'는 영어에서 말하는 페스트의 다른 이름, 즉 'The Black Death'를 직역한 말로 보이는데, 이편이 더 알기 쉬운 단어다. 어떤 흑사병은 몸이 괴사되어 검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흑사병과 페스트 중에 굳이 페스트를 선택한 이유를 알고 싶다... (참고로 말하자면 위에서 계속 대조해본 1950년도 미야자키 미네오의 번역본 제목이 '페스트'이다.)

 

 

위에서 본 대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오래전 번역자들이 어떤 어휘와 문장을 썼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사실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런 걸 찾아보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앞쪽으로 돌아가자면 '동양 최초의 <이방인> 번역'이라는 말은 그대로 수긍하기가 어렵다는 게 내 결론이다. 1960년에 초판이 나와 2012년까지 개정을 거듭한 <페스트>에서도 일본어의 흔적은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앞서 번역되었고 <페스트>는 더 나중에 나온 번역본인데도 그렇다. 나중에 나온 번역본도 일본어 번역을 참고했는데 그보다 앞에 나온 번역본은 일본어 번역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사실 낮다고 본다. 게다가 지금 그 '동양 최초 이방인 번역'은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다. 이 최초 번역본을 확인할 수 있다면, 아니, 사실 그 이후의 판본과 일본어 판본을 대조하기만 해도 이 의문을 대강은 확인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는 나중의 과제로 미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지적해두고 싶다. 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휘영' 항목의 집필자 또한 이휘영 선생의 제자로 추정되는 분이다... 그분이 가장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여쭤볼 방법이 없어서 많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