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성범죄 사건은 오랫동안 '피해자'에게 과도하며 부당한 쪽으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쪽으로 이름을 붙여왔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최근 몇 년 들어 많이 수그러들었다. '조두순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건 또한 처음에는 피해자 가명이 드러나는 쪽으로 이름이 붙었다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는 보호해야 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지적과 질책에 따라 '조두순 사건'이 되었다.
엊그제 고인이 되신 그분은 한국 최초의 성희롱 범죄 판결에서 승소를 이끌어냈다. 당시 그 사건은 너나할 것 없이 '우 조교 사건'으로 불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여성운동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왜 우 조교 사건인가, 범죄를 저지른 '신 교수'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때 이미 이런 흐름이 있었고 이 또한 '조두순 사건'이 '조두순 사건'이 되도록 만든 배경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언론에서 '조두순 사건'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 소위 '우 조교 사건'은 어떨까. 그분이 고인이 되시면서 생전의 활동을 돌이켜보고 생애를 짤막하게 정리하는 정리회고성 기사가 주요 신문에 거의 다 실렸는데 예상이 별로 빗나가지 않았다. '범죄자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식으로 사건의 이름을 명시한 기사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인권변호사 출신 시민운동가…3선 서울시장 넘어 대권 꿈꾸다 허망한 마감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020004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한때 여성 인권변호사 명망…국내 첫 ‘성희롱 재판’ 승소 끌어내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016336
서울대 우 조교 사건
참여연대 설립·성희롱 첫 승소… 스스로 무너진 '시민운동의 대부'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545686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박원순, 인권변호 앞장서다 시민운동가 변신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297119
서울대 우 조교 사건
시민운동 ‘도덕성’에 상처 남기고 간 박원순
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514590
서울대 신 교수 사건
인권변호사에서 최장수 서울시장까지…박원순은 누구인가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04561
보다시피 이 여러 기사들 가운데 '신 교수 사건'을 '신 교수 사건'이라고 부른 신문사는 한겨레뿐이다. '조두순 사건'은 '조두순 사건'이라 표기하는 많은 언론사에게 '신 교수 사건'은 여전히 '우 조교 사건'인 것이다. 언론들이 소위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려 애쓰는 점은 잘 알고 있고 모든 '내로남불' 또한 한 순간에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용어 하나일지라도 이를 섬세히 다루는 순간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여러 신문사들은 이번에 크게 실망스러웠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그분은 어땠을까... 나는 이 기사를 보는 순간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키는 걸 느꼈다.
"우 조교가 아니라 신 교수" 박원순의 이유 있는 '핀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15665
그렇게 잘 아는 분이, 역사적인 승소를 이끌어내 본인 또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분이, 왜 그런 의혹을 직접 해명하려 하시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려 하시지 않고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버리는 선택을 했을까. 대의와 헌신과 운동과 정치, 그리고 이를 업으로 삼고 살아왔으나 여전히 나약한 한 '개인'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하고 캄캄한 구멍 같은 게 바로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