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인용

'시부사와 자본주의'

Gigi_지지 2019. 4. 9. 13:53

내가 '시부사와 자본주의'라는 조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버블이 끓어오르고 리쿠르트 사건이 국회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었던 때였다. 글로벌화가 초래하는 새로운 경제활동의 물결과 격리된 기존의 일본적인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생각했던 게 계기였다. 시부사와는 물론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를 말한다. 그만큼 장기적인 시간축에 따라 파악하지 않으면 80년대의 버블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이래 자본주의와 일본 문화 사이에서 교묘하게 중심을 잡고 수정하는 구조를 만들어왔다. 자본주의에는 우승열패의 냉철한 논리가 작동한다. 봉건사회를 막 빠져나온 일본에 이 구조를 심어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어떻게 사회적인 마찰을 줄일 것인가. '의리합일(義利合一)' '논어와 주판'이라는 철학은 이 모순이 넘치는 과제에 대한 시부사와 나름의 현실적인 답안이었다. 시부사와 자본주의란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움을 일본 식으로 억제하고 해외에서 거칠게 밀려 들어오는 자본과 문화의 공세를 중재하는 일본의 독자적인 엘리트 시스템이었다. 

 

시부사와가 살았던 시대에는 '시부사와 자본주의'와 길항하는 다양한 라이벌도 등장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데올로기와 행동을 계승한, 구미형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까운 노선, 그리고 미쓰비시 재벌의 이와사키 야타로로 상징되는 독점을 지향하는 '재벌자본주의' 노선. 메이지 이후 일본 자본주의는 이른바 이 세 유형의 자본주의가 길항하며 이루어내는 다이내미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_나가노 겐지, <버블ㅡ일본 방황의 원점>에서

 

* 오늘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2024년부터 일본 지폐 디자인이 바뀐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후쿠자와 선생'은 속어로 '1만엔짜리 지폐'를 의미하는데 그 시대가 끝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1만엔짜리 선생'은 누구인가 했더니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누구더라? 분명 어디서 들었는뎅? 숫자에 약하고 경제나 경영은 뭐가 뭔지 감히 도전해볼 엄두도 나지 않지만 졸음을 참아가며 읽어보려고 애쓰던 책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버블>이었고, 거기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지향했던 '장사/사업의 이념'을 간명하게 보여준 부분이 있었던 게 홀연히 떠올랐다. 

 

일본에서 유교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다. 사족들에게는 나름 중요한 이념이었던 것 같은데 역시 말단 사족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서전을 보았을 때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비' '유생'의 이미지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이런 예를 먼저 드는 게 좀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본의 아니게 '누드 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자서전에 담았다...) 그들에게 유교란 어떤 사회적 이념이었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물론 우리가 아는 중국 고전에 대해서는 그들도 다 알고 있었고 지배층은 상당한 지식을 쌓아야만 했다). 

 

간략하게 파악한 바에 따르면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장사'도 어쨌거나 당시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유교의) 도리'에 따라야만 함을 설파한 사람이었다. 그는 올바른 도리에 따라 부를 일구지 않으면 그 부는 오래 갈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논어와 주판>(1916)은(제목이 진짜 멋지다. 유교라는 이념과 장사를 상징하는 단어를 고른 이런 제목은 요즘 시대의 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현대적이다) 아직도 '고전'으로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니 지금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던 그때에는 정말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타난 인물이었을 테지만 무사이자 장사꾼이라는 '신분', '무사이자 장사꾼이 말하는 도리에 따른 장사'라... 아는 것도 없기는 하지만 이것저것 뒤져보면서 역시 이 나라와 저 나라는 말기로 올수록 굉장히 많이 달랐고, 그럴수록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