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아베 정권’을 아직까지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우치다 타츠루의 긴급제언
기사입력 4/19(日) 11:00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원숭이화’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만 괜찮으면’이라고 생각하는 ‘원숭이’에서 탈피하여 긴 안목으로 생각하는 시간 의식을 되찾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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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숭이화하는 세계サル化する世界』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확실히 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이 다른 종으로 변했다든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여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의식도 변화했다는 뜻입니다.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시간의식입니다.
제가 태어난 1950년, 일본 노동인구의 50퍼센트는 농업 종사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농사에 맞춘 시간’ ‘농사력(曆)’을 호흡하며 살았습니다. 아침해와 더불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들었습니다. 봄에는 씨앗을 뿌리고 일조량, 예년보다 덥지 않은 여름, 풍수해, 병충해를 두려워하며 무사히 가을을 맞아 수확을 거둘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렇게 ‘농사에 맞춘 시간’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일본인의 시간의식의 토대를 형성했습니다.
회사의 ‘바람직한 모습’보다 당기의 숫자를 우선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70년이 지나 산업구조가 고차원화함에 따라 일본인의 시간의식도 그 시대에 지배적인 산업구조에 적응하여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금융자본주의의 ‘거래의 시간’에 인간이 적응, 순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금융상품 거래는 1000분의 1초 단위로 알고리즘이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경영자들은 당기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봤자 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익이 악화하여 주가가 떨어지면 이미 그 다음은 없습니다. 10년 후, 20년 후 회사의 ‘바람직한 모습’보다 당기의 숫자를 우선합니다. 우리 회사의 설립의도는 무엇이었는가는 아무도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기업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조급한 시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숙고한다는 습관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딱히 머리가 나빠서라든가 인간성이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간의식이 환경에 적응하여 변한 것뿐입니다. 1000분의 1초의 세계에 리얼리티를 느끼는 인간은 ‘농사에 맞춘 시간’을 사안의 옳고 그름을 숙고하는 ‘기준’으로는 이미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만 괜찮으면 미래의 내가 어떻게 될까는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극히 짧은 주기로만 무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축소된 시간의식에 익숙해지면 이미 인간적 성숙 그 자체를 바랄 수 없게 됩니다. ‘자기 도야’란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자신을 성숙시킴을 말합니다.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숙려합니다. 가장 성숙한 사람은 ‘세계의 시작’부터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광막한 우주적인 시간 안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 일생이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답파할 수 있는 공간이 모래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각하여 그 허무함, 비소함을 깨달음으로써 나는 여기서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이는 시간의식이 사분기까지 축소된 사람에게는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농사에 맞춘 시간’조차 실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주적인 시간’을 실감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도야’라는 말 자체가 사어가 됐습니다. 도기를 굽고, 금속을 주조하듯이 느긋한 시간을 거치며 형성되는 자신을 파악할 수 없게 됐습니다.
‘조삼모사’라는 고사성어가 가르쳐주듯이 축소된 시간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침의 자신’이 ‘저녁의 자신’과 동일하다는 실감조차 없습니다. ‘지금만 괜찮으면 미래의 내가 어떻게 될까는 알 바가 아니다’라는 찰나주의에 빠져 ‘이런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하면 언젠가 큰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사실은 알고 있더라도 ‘언젠가’에 대한 실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질질 끌며 계속합니다. 이러한 경향을 저는 ‘원숭이화’라고 불렀습니다.
코로나 재앙에서 예견되는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지 않는 일본인
일본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에 대해 우왕좌왕하는 대책은 ‘원숭이화’의 좋은 예입니다. 위기관리에 필요한 것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힘과 미래의 리스크를 상상하는 힘입니다. 과거의 사례를 돌아보고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고쳐야 할 점들을 고쳐야 합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생생한 리얼리티를 느끼는 감수성 없이 위기관리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거의 실패를 잊고 아무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사태에는 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플랜 A가 실패했을 때의 플랜 B, 플랜 C를 생각해두지 않습니다. ‘참모본부가 입안한 작전이 모두 성공하면 황군 대승리’라는 노몬한, 임팔 이래의 멘탈리티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여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라며 차단당합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비관적이 되고 의기소침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발상 그 자체가 ‘패배주의’로서 배척됩니다. ‘패배주의자가 패배를 불러온다’며 미움을 받습니다. 저는 무술인이므로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습관입니다만 일본 사회에는 이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코로나는 세계 각국에 배포된 ‘입시 문제’
지금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은 ‘입시 문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에 어떻게 적절히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세계 각국에 동시에 배포되었습니다. 아직 정답은 누구도 모릅니다. 조건은 같습니다. 다른 문제였다면 외교, 재정, 교육, 의료 등에서 국가별로 안고 있는 문제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간단히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대유행은 다릅니다. 모든 국가가 같은 조건에서 적절한 대응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현재 타이완, 한국, 중국이 감염 확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감염 확대를 막는다’라는 교훈을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도시 봉쇄, 감염자 완전격리, 개인정보 공개와 철저한 검사... 각국의 방식은 달랐지만 어쨌든 거의 억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무엇 하나 성공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억제할 수 있다’라고 세계에 보고할 만한 성과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행히 일본은 심각한 감염 폭발에 이르지 않았지만 이것이 어떠한 방역정책의 ‘성과’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검사(자) 수를 억제했을 뿐이고 사실은 감염 실태를 정부도 파악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해외 매체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에서 배울 수 없는 아베 정권
일본과 한국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감염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은 종식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렇게 하면 괜찮다’라는 경험지経験知를 축적해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심각한 감염폭발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나 이는 억제책을 강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조석변개식의 지시를 내놓고 ‘하는 척’을 연출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내 매체는 그렇게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해외 매체에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국가가 선행하는 성공 사례에서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 어느 국가든 중국의 도시봉쇄 정책에다 한국, 타이완이 실시한 완전격리・검사 체제라는 훌륭한 성공 사례를 조합한 ‘해답’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유행 때는 ‘컨닝’도 가능합니다. 따라할 수 있는 성공 사례는 뭐든 따라해도 괜찮습니다. 인류를 위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일본은 그게 안 됩니다. 아베 정권의 핵심 지지층은 혐한・혐중 발언을 퍼뜨려온 사람들입니다. 한국, 중국의 성공사례를 따라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에 뒤지는 것’이며 아베 정권의 지지층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굴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이 지지층을 배려하여 '일본의 독자적인’ 감염 방지책을 실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는 그러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코로나 대응에서 명암이 갈린 미국과 중국
대유행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감염증 대책에 예산을 투입했다면 ‘일본의 독자적인’ 방역 대책을 제언할 수 있는 체제가 성립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패배주의이므로 일본판 CDC(질병통제예방센터)도 여태껏 만들지 못한 채 지금의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이 종식되었을 때 일본의 방역 대책은 ‘선진국 가운데 최하점’에 가까운 평가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연한 불운이 아니라 일본인의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는’ 경향이 초래한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으로 트럼프 대통령도 위기관리 능력이 신통치 못함을 노출했습니다.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 따라 국제 공조에 등을 돌려왔는데, 지금의 코로나 재앙에도 트럼프는 ‘미국만 괜찮으면 그만이다’라는 자국제일주의를 드러내며 가을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 지지자들에 대한 호소를 우선하고 국제 사회에 지도적인 메시지를 내놓을 책임을 방기했습니다.
그런 한편 감염 대책에 대해 경험지를 쌓은 중국은 의료 자원을 세계 각국에 보내고 있습니다. 감염증이 종식되었을 때 세계의 많은 국가가 ‘미국과 유럽 국가가 자국제일주의에 휘둘리는 가운데서도 중국만이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인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진핑은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을 통해 ‘중국은 관대하며 우호적인 대국’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선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적극적으로 다른 국가를 지원함으로써 국제적 지위 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의도는 냉정하지만 행위 자체는 인도적입니다. 트럼프는 발밑만 보는 코로나 대응으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무능하고 대책 없는 정권이 40퍼센트를 넘는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이데올로기에 따라 아베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민당 지지층의 절반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지지자들은 무엇을 지지하고 있는 걸까요?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비판하면 안 되는 풍조
여론조사에서는 종종 ‘달리 지지할 만한 당이 없다’는 것이 가장 높은 지지 이유를 차지합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아베 신조가 총리대신에 적합한 이유는 현재 총리대신이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에 다름 아닙니다.
칼럼니스트 오다지마 다카시小田嶋隆는 이전에 트위터에서 아소 다로麻生太郎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런 비판은 당신이 재무부 장관이 되고 나서 하라’는 멘션이 날아왔습니다. 재무부 장관 외에는 재무부 장관의 정책이나 자질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사실 지난 10여 년 동안 일본 사회에 널리 만연했습니다. 저 또한 정치에 관한 의견을 말하면 ‘그러면 당신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식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아니면 국정에 대해 논의할 자격이 없나 봅니다. 이와 같은 논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튜버가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비판하면 ‘구독자 수가 그만큼 늘어나면 말하라’라고 하거나 인터넷에서 부자의 언동을 비판하면 ‘그만큼 돈이나 벌고서 말하라’는 식입니다. 권력자나 부유층에 대한 비판은 그만한 권력자나 부유층에게만 허용된다는 이상한 논법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비판하는 동기는 질투이며 선망이다, 그렇게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인간의 비뚤어진 마음이다, 꼴사나우니까 관두라는 뜻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현 상태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는 ‘주제를 알아라’ '분수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벚꽃을 보는 모임’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벚꽃을 보는 모임’만 해도 총리대신이 자신의 지지자를 불러 세금으로 접대하는 게 뭐가 나쁘냐며 왜 문제를 제기하는지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되는 거 아니냐, 뭐가 잘못이냐? 권력자란 ‘무슨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 사람’ 아닌가? 법의 지배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아베 신조는 권력자니까 무슨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고, 법의 지배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런 보람이 있어 권력자가 되었으니 아랫사람은 이를 비판할 권리가 없다, 비판하고 싶거든 당신이 아베 신조의 위치에 올라가보라. 이러한 논리가 리얼리즘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분수를 알라’는 ‘사어’가 되살아난 일본
제가 소년이었을 때는 ‘분수를 알라’며 야단치는 어른이 아직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도성장기를 경계로 그런 말을 하는 어른은 사라졌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고도성장이란 모든 국민이 ‘분수를 잊은’ 욕망에 불타 ‘주제 넘게’ 틀을 깨고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일을 떠맡으며 이에 의해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국력이 커지고 국운이 성할 때는 누구나 ‘분수’ 같은 걸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진공관을 만들던 동네 공장이 할리우드 영화 회사를 사들이고, 고베의 약국이 세계적인 슈퍼마켓이 되고, 우베의 양복점이 세계적인 의류회사가 되는 시대에 ‘분수를 알라’는 말은 사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는 일본의 국력이 저하하고 국운이 쇠퇴해왔다는 징표입니다.
현 정권이 지지받는 이유는 ‘일본이 내리막길이기 때문’
인간은 파이가 커지는 시기에는 분배 비율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자기 파이가 이전보다 늘어났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지만 일단 파이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태도가 싹 바뀝니다. 옆 사람의 몫이 신경쓰입니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분배하는가, 사정기준을 제시하라, 등급을 매긴 근거를 제출하라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생산성이 어떻고 사회적 유용성이 어떻고 성과가 어떻고 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전부 ‘가난함’ ‘쩨쩨함’의 징후입니다. ‘내리막길에 있는 나라’ 고유의 현상입니다.
현 정권이 지지받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일본이 내리막길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옆 사람의 ‘분수를 모르는’ 행동을 규제하는 데는 상당히 열심이지만 창의성을 높이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옆 사람의 젓가락질까지 시끄럽게 참견하는 이유는 한정된 자원을 서로 뺏기 위해서입니다. 나라를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은 배가 침몰하고 있는 때입니다. 배에 실린 화물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까를 논의하고 있을 여가가 없습니다. 이 배 밑 어딘가에 큰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를 발견하고 구멍을 막는 게 최우선입니다. 이를 위한 시간은 이미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치다 타츠루/주간분슌 2020년 4월 9일자
원문
「無策な安倍政権」をいまだに支持し続ける人がいる理由――内田樹の緊急提言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200419-00037140-bunshun-pol&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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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상가 "코로나19로 일본의 잘못된 정치문화 드러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11564890&sid1=001
어제 이 뉴스를 읽다가 반가운 이름(?)이 보여서 원문을 찾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마이니치신문 유료 구독자만 전문을 볼 수 있어서 포기하고 대신 다른 기사를 찾아보다가 야후재팬에 올라온 분슌온라인의 기사를 읽게 됐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책을 '문제 풀이'에 비유하는 등 마이니치신문의 기사와 비슷한 논조가 아닌가 싶어서 번역해 올려본다.
일본이 지금 효과적으로 코로나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만 괜찮으면 미래는 알 바 아니다'라는 쪽으로 시간의식이 바뀌어왔고(원숭이화), 윗사람을 비판하지 않는 풍조가 오랫동안 만연해온 데다 이게 결국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는 나라에서 분배를 가지고 다투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거의 다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더 이상 고도성장처럼 파이를 폭발적으로 키울 수 없는 이상에야 앞으로 '분배' 문제는 더욱 중요해지지 않을까 싶다. 일단 침몰하는 배의 구멍부터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틀리지는 않았겠지만 앞으로 파이가 커질 가능성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분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무척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물론 그런 부분은 또 다른 지면이나 책을 통해서 다루어질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 원저자와 매체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공부를 위해 한 번역입니다. 원저자 및 매체의 요구가 있을 때는 즉시 번역문을 삭제하겠습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으며 발견하는 대로 수정해나가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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