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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사고는 현대 문명이 만들었다. 현대 사회는 불행에 조우한 사람들의 슬픔마저도 기술적이고 산업적으로 처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사별의 슬픔은 이웃과 함께 공감하며 나누는 어떤 것이 아니라 홀로 견뎌야 하는 것, 스케줄과 배상금에 의해 치환되는 어떤 것이 된다.
(...)
일본에서는 조직의 각 부분의 책임자로부터 가정의 주부에 이르기까지, 관의 수장으로부터 민의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각이 사회에 등을 돌리게 된 '비밀'을 갖고 있다. 민주적인 사회의 정보 환경은 각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의견을 사회에 전하는 시민적 노력과,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권리의 확립, 양자로부터 성립한다.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제때에 제대로 사회에 전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프라이버시 의식 역시 희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미성숙한 정보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사적인 체험을 시민 사회가 공유하는 지식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그럼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사람들의 마음에 기대어 이 책을 썼다.
_노다 마사아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에서
* 그해 4월 16일의 참사가 있고 난 이듬해 나온 책이다. 대형 사고로 생각지도 못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어떤 슬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피해자 중심'의 보상, 배상, 진상규명 과정이 아니라 이것들이 '가해자 중심'으로 돌아갈 때 유족들에게 어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되는지, 이 와중에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비극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기생적인 집단들의 모습 등 '그날'이 가져온 비극과 사회가 보여주는 양극단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얻고 있다...
나는 왜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손쉽게 '지겹다'라는 말을 꺼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건 자신들이 겪은 일도 아닌데 겪은 일처럼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왜 그 비극을 '이용해먹는다'라는 막말을 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혈육에게 참담한 짓을 할 수 있기도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이 겪는 비극에 공감하며 아파할 수 있기도 하다. 이 양극단 사이의 넓은 스펙트럼 중 왜 '전자'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게 곧 자신들의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이 어떻다는 걸 그대로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위에 나온 말처럼 타인의 슬픔을 '기술적이고 산업적으로' 처리하며 '스케줄과 보상금으로 치환'하려는 태도를 가지기 이전에 내가 겪지 않은 일에는 좀더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그 일은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일이다. 그들이 겪는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입을 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그리고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저 양극단 사이 어디쯤에 서게 될 것이다. 어디에 설까는 어떤 이들이 좋아하는 말대로 '자유'다. 그런데 그 '자유'가 본인의 '인간됨'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도 분명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날의 일로 아직까지도 많은 아픔을 겪고 계신 유가족 분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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