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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국내도서
저자 : 노마 필드(Norma Field) / 박이엽역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199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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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시대는 그의 목숨과 함께 끝났다.

(...)

1989년에 그 자리에 선 자는 새 천황,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고 카리스마를 결한, 그러나 한결 유용할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무대 뒤켠에서 지루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고지식한 아들이었다. 그해 8월 15일에 그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아버지가 죽고 처음 가진 공식회견장에서 '여러분과 함께' 헌법을 준수하겠노라고 대담하게 언명하였으나ㅡ그 성명은 의외로 친근미 넘치는 어조 때문에 특기할 만하였다ㅡ그 뒤에는 예상대로 신중해지고 말았다. 

(...)

8월로 접어들자 모토시마 시장은 줄곧 무대 위에 서 있는 형국이 된다. 조선과 조선인에게 일본 정부가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광고에 정치가로서는 유일하게 서명을 한 것이다. 더이상 천황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건만, 새로 즉위한 천황이 처음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쟁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는 발언도 한다. 

 

_노마 필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에서 

(*책의 외래어표기법은 따르지 않음)

 

일본에서 새 왕(천황)이 즉위하면서 '헤이세이' 시대도 끝났다. 아참, 그러고 보니 상왕이 되어 물러나신 그분이 즉위할 즈음에 쓰인 책이 있었지 싶어서 오랜만에 다시 꺼내보았다(국내 발간은 1995년). 

 

생각해보니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일본에 관한 진지한 책'이자 '탈식민'에 관한 책이었다. 처음 이 책은 그간 내가 살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반일'의 연장선상에서 읽혔다. '전쟁 책임' '식민 지배'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었기에 나름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간 겪어왔던 이런저런 경험과 알게 되었던 사실들이 날줄과 씨줄처럼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힌다.

 

일본은 구 식민지 사람들뿐만 아니라 천황제와 국가에 의문을 품고 이를 공공연히 발언하는 사람들조차 배제하고 차별해온 국가이다. 일장기를 불태운 오키나와 사람이건, 죽은 자위대 대원 남편을 호국신사에 합사하지 못하겠다는 부인이건,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는 시장이건, 그들은 모두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도, 그리고 천황제나 국가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배제된다. 천황이나 국가에 반기를 드는 자들은 '비국민'이며 그런 '비국민'들이 국가와 '트러블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꼴을 당하는지 이 책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시종 '개인의 자유와 존엄'에 입각한 그 묘사가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미국인'[일본/미국 혼혈이지만]의 시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그런 한편 일주일에 한번씩 '애국조회'라는 데 참여하여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어야 했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어야 했던 전통이 어디로부터 왔던가에 대한 생각, 내가 그러면서 꼬꼬마 시절을 보내던 때, 바다 건너편 일본에서는 국기며 국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고 허울뿐인 명분이라고는 하나 '군대'도 갖지 못한 나라였다는 사실, TV에서는 허구한 날 재일교포들의 지문날인에 대해 떠들었지만 정작 그렇게 떠드는 나라의 온 국민은 일정 나이가 되면 지문을 등록하도록 만들었다는 데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내로남불'을 시전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게 되는 것이다(그 이유로는 방첩, 공산주의 위협을 들 수 있겠는데 그게 온 국민을 아직까지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면서 지문 수집을 해야 할 절대적으로 정당한 근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가 국민을 통제하고 길들인 방식, 약자들을 짓밟아온 방식이란 '저 나라'에서 배워온 그 방식과도 어찌나 비슷한지,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더 분통이 터진다. 

 

'일제'가 물리적으로 한 번 청산되었던 날, 말하자면 '독립'이 되던 바로 그날은 사실은 식민지가 청산되었던 게 아니라 아무도 알 수 없는 시작에 불과했다는 걸 기억해야만 하지 않나 싶다. 이 나라가 무엇을 식민지 경험에서 받아들여 이용하고 무엇을 내쳤는지, 그리하여 무엇을 얻게 되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다시금 '(무엇에 대한 누구를 위한)청산'을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좀더 섬세하게 따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저들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심지어 천황제가 사라진다고 한들 식민지 지배 체제에서 배워서 지금도 공고하다고 할 수 있는 '약자 억압'의 체제가 순식간에 사라질까? '저 나라'가 지구상에서 없어지면 정말 '이 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 한발 더 나아간 사회가 될까? 호기롭게 '그렇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그런 기회는 그들이 이 땅에서 쫓겨난 70년도 더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상기시켜주고 싶다. 그러나... 언제나 외부의 적이 내부를 더 단단하게 결속시켰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