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두 사람 중 하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

category 말들 2020. 4. 16. 02:53

최악보다는 차악을 택하겠다는 민심이 여실히 드러난 선거, 라고 생각한다. 투표율이 60퍼센트를 넘어갔을 때 양쪽 진영 다 우리가 언더독이라고 생각하고 '영혼까지 끌어모은' 선거가 아닌가 싶었다. 1, 2위 차이가 초박빙인 곳도 많았고 오래전에는 한 후보자에 60~70퍼센트씩 몰아주기를 했다면 그만큼 차이가 나지 않게 된 지역도 많았다. 이긴 자는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고 진 자는 아마도 분루를 삼키며 쐬주를 들이붓지 않을까 싶은 날이다. 

 

여당이 압승을 거둘 거라고는 하나 그들이 꼭 생각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 이제 진영은 거대양당 구도로 완전히 갈라져버렸고 국민 가운데 둘 중 하나는 당신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도 함께 품고 갈 수 있도록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서 당신들의 정책이 지지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익'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상대 당 설득이 안 되면 국민들을 대상으로 설득하기 바란다. 지금까지 해온 걸로 봐서는 여당 쪽에 그런 포용력이 있는지 정말 의심스럽지만 이제라도 걸음을 잘 내딛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분열과 양극화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어쨌거나 정권을 잡은 역사가 20년이 가까워오니 뭐라도 성과를 내야 한다. 시대가 달라졌긴 하지만 1955년에서 1975년 즈음까지의 변화와 당신들 20년 집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마 퇴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한번 상전벽해가 된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만한 패러다임의 전환, 그만한 물리적 변화 없이는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맞다, 라고 정말로 주장하고 싶다면 적어도 산업화 시절이 더 좋았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끔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설득한 만큼 성과를 내줘야 한다. 

 

물론 야당도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지지자들만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어도 패배한 이상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소수'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여당과는 입장이 아주 다르다. 삭발과 단식과 개싸움이 유효할 때도 있겠지만 '오죽하면 저러나'라는 소리가 사람들 입에서 나오기까지 상대 당과 지칠 만큼 협상 테이블에서 '협상'을 해야 한다. 같지도 않은 말싸움이 아니라 말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지 망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꼬마아이도 '더러운 말'과 그렇지 않은 말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사람들이 보통 진보에게서 일종의 파죽지세 같은 혁신성과 희생에 가까운 헌신성, 뜨거운 열정을 원한다면 보수에 원하는 것은 '안정적인 품격'이다. 어쭙잖게 데모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 흉내를 내지 말고 우리를 믿으면 안심할 수 있다, 당신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대통령 탄핵도 그분이 감옥에 갔으니 끝, 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계속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빌미가 될 거니 어떻게 선을 긋고 환골탈태할 건지도 아주 많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대통령 탄핵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정권과 여당의 완벽한 실패를 의미한다. 안정보다는 두고두고 불안의 씨앗이 되는 요소다. 

 

이제 구도는 진보 vs 보수가 아니라 신 보수 vs 구 보수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가정을 이루면 저절로 보수화되는 부분이 있다. 작년 여름 이후 죽도록 욕을 먹은 586세대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도 뭐 별다른 게 있을까 싶다. 식구들 몸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자식들도 반듯하게 잘 커줬으면 좋겠고. 그런 마음이 '보수'의 단초가 된다고 보았을 때, 그런 '안정'을 줄 수 있는 파트너로 그들은 결국 현재의 여당을 택했다. 그건 여당이 혁신적이고 진보적이어서가 아닐 것이다. 구 보수의 수명이 다했고 그들에게 나와 내 가족의 안정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해서가 아닐까? 솔직히 나도 여당이 싫지만 그렇다고 텐트 내에서 셋이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에게 정권을 주고 싶지는 않다. 누가 중요한 자리에서 체면도 없이 그런 얘기를 마구 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나랑 생각이 다르니까'라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마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을 것이다. 이게 거대 야당의 현 이미지다. 그들은 '둘 중 하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해보라고 권하기도 힘든 지경이다.

 

여당은 지지세력의 연령대를 잘 분석해서 이제 자기들이 '보수'에 가까운 세력이 되었음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아마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보수 세력이기에 이제부터 나타날 새 보수의 단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여름의 법무부장관 사태가 중요한 힌트가 된다고 본다. 내 새끼 기회 주자고 남의 새끼 기회를 뺏는 건 양아치일 뿐이다. 그런 사태가 반복되면 새로운 보수가 구 보수 꼴이 안 난다는 보장이 있는가? 오래전 '민주화'의 도덕적 정당성은 이미 그때 다 명분을 잃었다. 우리는 솔직히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보수적이 된 부분이 있다, 뭐든 다 뒤엎는 혁신의 이미지보다는 우리 정책과 법률 하나하나가 국민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라고 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물론 말로만 하는 건 사양이다.

 

아무튼 내가 경험한 선거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고 또 의미도 있는 선거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사람들은 여당의 숱한 실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여당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선거는 정말 드물지 않나 싶다. 이게 뭔가 새로운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