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 알베르 카뮈 지음, 이휘영 옮김/문예출판사 |
코로나의 기세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되었고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던 초기만큼 이 책을 언급하지도 않는 것 같아 문득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이방인>을 읽다가 두손을 든 기억이 있는지라 완독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생각보다는 쉽게 읽혔다.
194X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 갑작스럽게 치사율이 높은 페스트가 번지기 시작한다. 걸리면 십중팔구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병이라는 점에서는 코로나와 다르지만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는 사실은 똑같다. 오랑은 고립된다. 화자가 전달하는 이 고립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금 전 지구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심지어 '안심'을 위해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도 똑같다(책에서는 사실상 효과가 없다고는 하지만, '믿음직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그 마스크 가격이 폭등한 것이 문제가 된 것처럼 오랑의 물가는 오르고 밀매도 이루어진다.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은 '격리'되고, 외부와 차단된 도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격리'에서 오는 고립감(귀양살이!)과 이별에 힘들어한다. 정말 오래전에 쓰인 책이지만 치명적인 감염병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 때 일어나는 일들은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읽다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카뮈라는 작가가 지닌 엄청난 상상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페스트가 물러간 뒤'를 그리는 5부였다. 적절한 치료제가 개발되어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전'의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또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보여주는 세계는 꼭 그렇지는 않다. 갑작스레 찾아올 때와 달리 페스트는 이제 물러갈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될 때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침내 고립에서 해방되었을 때도 얼싸안고 기뻐하는 사람들 틈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해방과 일상으로의 복귀를 꼭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타루는 페스트가 그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시민들의 가장 강한 욕망은 현재도 또 앞으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선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딴 의미에서는 비록 충분한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으며, 페스트는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라도 그 흔적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사[리외]로서는 결국 타루가 평화를 되찾았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평화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루는 자기 말마따나 내기에 졌던 것이다. 그러나 리외 자신도 이긴 것이 무엇이었던가? 단지 페스트를 함께 겪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졌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 추억이 되살아나리라는 것만이 그가 승리한 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그 외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체험과 추억뿐이다.
시의 문들은 2월 어느 아름다운 날 아침에 시민들과 라디오와 현청 발표문의 축복을 받으면서 마침내 열렸다. 그러므로 필자에게 남은 일은 시의 문이 개방되던 기쁨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사실 필자 자신은 거기에 완전히 동화될 자유가 없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이 기록이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가지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해 수행해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인이 될 수도 없고 재화를 받아들일 수도 없기에 역시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아직도 수행해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이 될 수는 있으리라.
시내에서 올라오는 경쾌한 환호성을 들으면서 리외는 그러한 기쁨이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카뮈의 '부조리'란 이 글에 따르면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깨어 생명, 죽음, 우주, 존재, 무 등을 생각할 때 생기는 막막하고 아연한 감정"에 가까운 것이며 '이성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인 듯하다. 즉, 현재 인간의 이치로만은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그런 것과 맞닥뜨렸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만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페스트가 가져온 모든 사태는 이 책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의사 리외가 맞닥뜨려 깨닫게 된 '부조리'이며, 동시에 독자들도 알게 된 부조리이다. 이 책은 그러한 부조리로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치명적인 감염병 앞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과 하게 되는 행동들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한 부조리를 인정한다면(나는 인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전의 일상은 그러했을지언정 코로나와 같은 치명적인 병을 이겨낸 이후의 일상이란 우리가 이미 겪은 죽음에의 공포를 칼로 뚝 잘라내고 이전의 일상과 고스란히 접합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도 짤막하게 이 책 안에 들어 있으니 그 대답에 공감할 수 있는지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인용문 중 굵은 글씨로 표시한 단어는 이 책에 대한 다른 포스팅에서 언급할 단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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