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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장관 후보자님을 둘러싼 온갖 의혹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미 한 번 내로남불 끝판왕이 되시기 직전이라고 이야기했기에 뭔가를 더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30여 년 전에 쓰신 그분의 석사논문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오늘 읽다가 무척 흥미로운 지점들이 생각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좀 적어본다. 

 

일단 표절 문제...는 나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기는 하다. 남이 쓴 게 분명한 부분을 아무런 인용 표시 없이 쓰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쓴 것도 아니고 남이 쓴 걸 내것인양 한다? 분명 이는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이게 범죄라고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게 표절 문제는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표절을 했든 안 했든 사실 큰 관심이 없으며 그에 대한 법적, 도덕적 판단을 내릴 분들은 따로 있고 만약 이게 징계사항이 된다면 무슨 징계를 받는지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내가 흥미롭게 본 건 제대로 된 인용 표시나 패러프레이징을 하지 않았다는 문헌의 목록이다.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3&aid=0003471860

 

조국 석사논문, 日 법학책 33군데 출처 안 밝히고 베꼈다

[연구검증센터, 2015년 서울대 '표절 조사'서 드러나지 않은 의혹 제기] 3~4문장 번역해 통째로 옮긴 뒤, 마지막에 각주만 하나 달기도 논문의 약 30%가 일본책 문장 그대로… "일본인이 공저자인 셈" "30년

news.naver.com

이 기사에 등장하는 문헌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후지타 이사무 외(1976) <소비에트법 이론사 연구> 이와나미쇼텐.

__________________(1983) <소비에트법 개론> 유히카쿠.

오다 히로시(1986) <스탈린 체제하 권력과 법: 사회주의적 합법성 원리의 형성과정> 이와나미쇼텐.

우에다 간(1985) <소비에트 범죄학사 연구> 세이분도. 

후쿠시마 마사오(1967) <사회주의 국가의 재판제도> (단저가 아닌 논문으로 추정. 수록 문헌은 확인하지 못함.)

나카야마 겐이치(1966) <소비에트법 개론: 형법> 유신도.

(이들 포함 총 15편의 일본 문헌을 참고했다고 한다.)

 

나는 이 목록을 보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반일선동에 가까운 그분의 SNS에서의 언동이 생각나서가 아니었다. 첫번째로는 그때 그시절 그분들(?)이 일본 문헌을 번역하면서 열심히 운동의 이론을 공부했다는 전설이 생각나서였다. 그분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분들의 스승뻘 되는 나이의 어른들도 사실 다 일본 문헌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 스승님들이 쓰신 각종 개론서를 보면 그분들이 누구의 제자로서 무엇을 배웠는지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시절이 바로 식민지 시기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 대학의 교수들은 누구였는가. 무슨 책을 볼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이후 그분들이 안아야 했던 공공연한 비밀, 그로 인한 일종의 수치와 굴욕과 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민족의 자부심' 등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학문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뻥 비워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쉽사리 찾을 수도, 드러나지도 않을 거라고 보지만 말이다(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쉽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법무부 장관 후보자님 세대의 '일어 공부'는 상당히 자생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놀란 건 이분의 석사논문이 1989년도에 나왔는데 1980년대, 그러니까 거의 동시기의 (일본의) 연구 성과도 섭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잠깐 찾아본 바로는 저 목록에 등장하는 일본의 법학자들은 정말 떠르르한 양반들이다. 한편으로는 정말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하려고 애를 썼구나 싶은 감탄이 들기도 한다. 다른 영미, 유럽 문헌들은 무엇을 참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소비에트 형법'을 연구하는 데 어째서 저런 상당량의 '일본 문헌'을 읽을 수밖에 없었을까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일단 이 목록이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 '서울대 법학과'에서 이분이 석사논문을 쓰기 훨씬 이전부터 저 문헌들을 본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른 거긴 하지만 참고문헌 목록이라는 건 적어도 석사논문 수준에서는 아주 새롭기가 힘들다. 일단 석사논문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독자적인 논의를 전개하기가 거의 어렵고 문헌 역시 선배들, 스승들이 보았던 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저 60년대의 문헌들은 분명 학내에서 누군가가 보았을 것이다. 이후 문헌들도 그럭저럭 입수하기도 쉽고, 영어나 유럽어에 비하면 좀더 쉽게 읽을 수 있는 문헌이라는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학문 연구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석사논문 단계에서 그럭저럭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일본 학자들의 책을 봐가며 논문을 쓰는 것. 분명 이분은 지금은 다 생각나지도 않을 30여 년 전의 석사논문에서 일본어 문헌을 참고한 게 뭐가 어떻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내 논문을 쓰는 데 도움을 준 문헌들은 분명 '빚'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갚을 필요는 없지만 무엇을 참고했는지 제대로 밝혀야 하고, 나중에는 그들의 업적을 넘는 논문이나 연구서로 갚아야 하는 빚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도교수 같은 직계 스승은 아닐지라도 그분은 분명 그들의 연구에서 무언가를 배웠고 그것으로 학위를 얻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스승으로 모시지는 않을지언정 자신이 무엇에 어떤 빚을 졌는지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분의 스승뻘 되는 분들은 자신이 무엇에 어떤 빚을 졌는지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정말로 단절하거나 단절한 척하며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분 세대도, 또 나와 같은 세대와 그 아래 세대도 그 '단절한 척'의 자장에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무엇과 단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늘 고민해야 하는 게 우리 세대의 책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미 공부에서 멀어진 사람으로서는 이런 정도의 생각밖에 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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