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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읽다

category 말들 2020. 7. 29. 06:04
一人秤單數 - 6점
/文藝春秋

 

(**주의**  이 포스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기사단장 죽이기 내용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 소설집 <일인칭 단수>의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1Q84에 갇힌 사람은 작가 자신이 아닐까?

 

대작 <1Q84>이후 하루키의 새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랬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 없는 남자들>을 제외하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부터 돌이켜보자면 이 작품은 나오자마자 일본의 젊은 세대로부터 딱히 좋지는 않은 평가를 들었다. '오징어 냄새가 난다'라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그 작품은 이제 하루키에게서 '동시대의 리얼리티'를 기대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특히 다자키 쓰쿠루의 친구로 기억하는데 당시 일본 삼십대 중반 남성의 휴대폰 벨소리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비바 라스베이거스'로 설정되어 있는 장면에서는 이 인물은 '동시대 삼십대'가 아니며 사실상 하루키 세대, 혹은 하루키 자신을 등장인물로 치환한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게 했다(유튜브에서 비바 라스베이거스를 찾아보시라). 그 모든 시대적 배경, 인물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 속 어느 지점으로 갖다놓아도 상관없을 듯한 장치들이다. 이 소설에 비판적인 이들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더라도 바로 이런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무슨 작품을 어떻게 쓰든 그건 작가의 마음이다. 그러나 나의 의심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더욱 짙어졌다. 인터넷과 휴대폰 없이 생활이 돌아가지 않는 오늘날, 하루키는 일부러 주인공을 깊은 산으로 보내버린다. 저것들을 등장시키지 않을 핑계를 대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이 없는 세계는 어디인가. 현실에 있었던 1984년의 세계이며, 하루키 월드 속의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 즉 1Q84의 세계이다. 실제 1984년은 하루키가 삼십대 중반, 서른다섯이었던 해이며, 작가로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 시기이자 첫 수필집을 낸 시기이기도 하다. 혹시 1Q84의 속편이 궁금한 사람이 있을까? 1Q84는 작가가 천신만고 끝에 '임신'에 성공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출산까지 가지 못했다면 어떨까?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게 궁금하다면 <태엽감는 새>를 속편으로 읽어도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본다. 이 소설의 배경이 바로 '1984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른다섯, 혹은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그의 소설에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생각해보자(<일인칭 단수>도 예외는 아니다). 그 남자들을 작가와 같은 세대라고 볼 때, 이제는 하루키 소설은 그 인물들이 1Q84에 갇혀 있으면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문'들을 이것저것 열어보며 겪게 되는 일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 두 개의 달을 뜨게 만들고, 그게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작가의 작법은 여전히 훌륭하다. 하지만 그건 이제 더 이상 '동시대'와 밀착하지 못하고 있다. 작가 생활이 30여 년에 가까워져서야 성공한 '출산'(기사단장 죽이기)을 하루키 본인의 작품세계만 놓고 보았을 때 하나의 성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혈육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아이를 키워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갈등이 시작되는 서사는 너무도 많으며 이에 대한 내적/외적 해결 방법을 다룬 서사 또한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그러니까 그런 작품은 흔하다) 이게 과연 진정한 성숙으로 봐도 괜찮은 문제인지 의심이 든다. 인생에 중요한 여자를 잃었다가 되찾고, 한 여자(자녀)까지 더 얻는 과정. 위험을 무릅쓰고 <기사단장 죽이기>를 아주 간단히 축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또한 소설가 구보 미스미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이 돈도, 일도, 여자도 너무 간단히 얻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요즘은 그 어느 것도 얻기가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휴대폰과 컴퓨터와 인터넷을 소설 속에서 쓰지 못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사실상 동시대와의 접속을 포기했다. 남은 것은 우연한 계기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이상한 일을 겪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인물과 그 과정을 살려나가는 리얼리티다. 독자가 그 모든 것을 현실성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드는 작법은 여전히 뛰어나지만 그 모든 일을 겪고 과연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든 변하긴 했을까, 변했다면 그것은 성숙인가 아니면 퇴보인가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하루키에게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이상이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소설집 <일인칭 단수>를 읽기 전에 갖게 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이 소설집의 작품을 읽은 감상을 하나씩 이야기해보고 싶다.

 

돌베개(石のまくらに)

'나'는 오래전 하룻밤을 같이했던 여성을 생각한다. 같은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점 외에는 딱히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하룻밤을 보내고 헤어지기 전, 나에게 자신이 사비로 만든 '단가집(일본 전통 시가집)'을 준다. 나는 그 단가집을 보며 그 하룻밤과 그 여성을 생각한다. 

 

전형적인 하루키식 '원나잇 스탠드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루키의 단가, 즉 일본의 전통 시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도 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방식이야 전통적인 하루키 스타일이지만 그녀가 준 단가집을 함부로 펼치지 않는 태도에서 엿보이는, 남녀관계라고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보이는 존중과 '활자가 찍혀 있는 것'에서 생생함을 떠올리는 방식은 이 작가가 '독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말'에 대한 아름다운 단상이 들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크림

'나'는 18세 때 겪은 기묘한 일에 대해 회상한다. 피아노를 같이 배우던 여자아이에게 피아노 리사이틀 초대권을 받고 가기로 한 나는 리사이틀 회장에 가는 길에 그 아이가 나를 놀린 게 아닌가 싶은 이상한 일을 겪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이상한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현실에 있을 법한 에피소드, 그러나 우리가 사실상 겪을 일이 없는 에피소드들을 배치하는 솜씨가 뛰어난 단편. 이 작품집에서 가장 하루키다운 단편이라고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하루키 작품 중에는 어어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되는 거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현실성에 빨려들어가게 되는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 또한 그렇다. 주인공을 따라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가 한 노인의 '크림'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정말이지 무심코 신호등을 보고 길을 건너다 다른 세계로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을 사실 자주 겪기도 한다. 꿈을 꾸고 있을 때 그 모든 장면들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그게 모두 현실이다. 하루키는 그런 장면을 엮어내는 데 정말 탁월한 작가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꿈을 꾸기 위해 날마다 눈을 뜬다"라는 제목의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대로다. 그런데 정작 '크림'...은 알고 보면 별 거 아닐지 모른다... 교훈을 기대하고 하루키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크림' 또한 그냥 녹아내리기만 할 뿐, 그것이 담고 있는 사상 같은 건 딱히 마음을 울리지는 않았다.

 

찰리 파커 플레이스 보사노바 

명 색소폰 연주자였던 찰리 '버드' 파커는 보사노바가 태동하기 전 사망했지만, 만약 그가 보사노바를 연주한 음반을 남겼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에서 출발하는 작품. '나'는 대학 시절, 그런 음반이 있다는 페이크 형식의 자세한 '음반 평론'을 한 편 발표하게 되는데 그 평론과 관련해 나중에 기이한 일을 겪게 된다.

 

단편소설의 형식을 빌리긴 했으나 음악잡지 같은 데 에세이로 써서 실었어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찰리 파커를 모르거나 알고 있더라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싶은 생각이 드는 하루키식 '음악 관련 소설'이기도 하다는 생각. 물론 찰리 파커를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음악가로 치환해 읽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더불어 이 소설에 나오는 재즈, 비틀스, 클래식 이야기가 작가의 취향이라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나 그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과연 흥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갈수록 많이 든다...

 

위드 더 비틀스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위드 더 비틀스> LP를 안고 교복을 입고 있던 소녀. 이 소녀의 이름도 모르지만 바로 그 장면이야말로 '나'의 고등학생 시절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실제 작품은 그 소녀가 아닌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전개된다. '나'는 어느 일요일 여자친구와 도서관에 가기로 하고 집으로 데리러 가는데 여자친구의 오빠만 있을 뿐 집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그 오빠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비틀스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단편이 없었던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비틀스의 인기에 비해 작가는 제대로 비틀스를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본인이 한 바 있다. 하지만 청춘의 배경음악으로서 비틀스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고, 그것이 또한 어떤 '상실'과 결국 연관된다는 측면에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과도 역시 연결고리가 있기는 하다. 에피소드들과 이미지가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하루키다운 '난해함'의 이미지가 오래 남는 작품.

 

'갑작스런 상실', 그리고 '회복'도 하루키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나 그 의미에 대해서 작가가 자꾸 독자에게 떠넘기기만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 그 사람은 죽었어야 하고(여전히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왜 당신은 회복되었는가. 물론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인생의 그런 측면은 여태까지 작가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는가. 이제는 좀 다른 '상실'과 '회복' 사이를 보고 싶다는 게 솔직한 바람이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야구에 대한 추억, 아버지의 죽음,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 그리고 자비출판했다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의 시들. 하루키의 '시'를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야구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딱히 마음에 다가오지는 않는 작품이었다.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작품에도 나오듯이 여기 나오는 '시'들도 못 썼다면 못 쓴 작품들이다. 하지만 야구와 추억과 맥주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음이 밝아지는 부분이 있다. 작품집 가운데 가장 밝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육제Carnaval

오십이 넘은 '나'는 우연히 '못생긴' F라는 여성을 만나 가끔 클래식 음악을 같이 듣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이 여성에 대해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소식이 들려오는데...

 

혹시 작가는 왜 작품에 '미녀'들만 등장시키느냐는 비판을 의식한 게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못생긴 여자'를 어떻게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 하지만 얼굴만 못생겼다고 할 뿐, 옷 입는 취향, 지적인 측면, 클래식을 즐기는 교양 등은 '얼굴만 교환하면' 이전 작품들과 별다를바가 없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으며 인물을 만들어내는 면에서는 실패가 아닌가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시나가와원숭이의 고백

'나'는 차를 놓쳐 우연히 가게 된 산지의 료칸에서 '말하는 원숭이'를 만나게 된다. 이 늙은 원숭이는 료칸에서 잡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말하는 원숭이에게 호기심을 느낀 나는 이 원숭이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 원숭이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신기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일손이 없는 시골 마을에서 숙식제공만 받고 일을 해주는 늙은 원숭이. 상투적인 해석이겠지만 이 원숭이는 '소수자'로 읽을 수 있다. 인간에게 길러졌고 덕분에 말을 할 수 있지만, 인간 무리에도 동족 무리에도 끼지 못하며 심지어 동족과는 짝을 짓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 원숭이는 인간이 갖고 있는 무언가를 훔치는 것으로 짝짓기를 대신한다. 도둑질을 당한 사람은 물리적인 해를 입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생활을 해야만 한다. 이 원숭이는 시골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려나 싶더니만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싶은 사건이 벌어진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위협이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원숭이를 소수자로 읽었을 때, 이 원숭이에게 갖게 되는 호기심과 막연한 공포는 소수자들에게 고스란히 투영된다. 나에게 딱히 큰 해는 없지만, 무언가를 훔쳐갈 수 있는 존재. 이런 존재를 의식하며 주변을 돌아보다 눈이 딱 멎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그런 지점을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하루키식 현실과 환상 허물기라고 단순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다른 방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면 또 시도해보고 싶다. 

 

일인칭 단수

'나'는 양복을 거의 입지 않지만 좋은 양복을 갖고 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혼자 입어보기도 한다. 기왕 입은 거 아까우니까 밖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찾아간 어느 곳에서 어떤 여성과 만나게 된다.

 

하루키의 주인공들, 특히 '나'가 이렇게 강렬한 적의에 부딪힌 적이 있었던가 싶은 놀라움이 드는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무례한 적이 있었나 싶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문제가 될 말도, 행동도 한 적이 없다, 정말 기억이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의 적의에 부딪혀야만 하는가.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과연 세상은 달리 보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함부로 말을 쏟아놓을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건 장난일 수도 있고, 말을 한 당사자는 심각하게 여기더라도 그 말을 받은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적의일 수 있다. 이를 방비할 수도 있겠지만 매우 피곤한 일이며 방비하지 않았다가는 '더러운 말'의 홍수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다. 때로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게 아니라 혓바닥만 날름거리는 뱀들과 사는 것 같은 세상이다. '동시대와의 접속'을 거의 포기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작품을 읽어낸다면 역시 작가가 '현실'을 다 무시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호기심은 여기서 정말 멈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는 어린 시절(?) 베스트셀러라서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가, 나이가 조금씩 들어 잊었다가, 하루키의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가 되어서 다시 찾은 그러한 작가이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연배가 아니며, 이 작가는 칠순잔치도 치르신 연세가 되었다. 

 

나의 삶도 그 어린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으며 생각도 달라졌다. 현실도 달라진다. 원래도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더더욱 읽지 않게 되었다. 어떤 무리에 끼지 않으며 일견 고독해 보이는 작품 속 주인공의 철저한 개인주의에 공감한 적도 많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주인공이 돌연 겪게 되는 환상과 모험에 늘 빨려들어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결국 달라졌느냐, 성숙했느냐는 애매모호하고 나만 변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일인칭 단수 '나'는 어느 무리에도 끼지 않고 고독해 보이는 개인주의자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1984년에 삼십대 중반이었던 어떤 이의 고독이며, 1Q84라는 세계의 고독이다.

 

작가는 변함이 없으나 내가 사는 곳은 2020년이다. 변함없는 작가의 미덕은 미덕대로 남겨놓고, 나는 이제 정말로 이 사람을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함없는 하루키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좋은 작품집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