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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삽입곡 두 곡(+드라마주제곡 썰)

category 올드카세트 2019. 6. 9. 00:26

 

즐겨보는 미드 가운데 하나는 대사에 온갖 문학작품과 팝에 대한 인용이 넘쳐난다. 특히 팝에 대한 사랑은 경이적일 만큼 놀랍다. 물론 이렇게 느끼는 건 내가 그 문화 안에서 자라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이런 인용이 너무나도 당연할 수 있으니까. 

X을 실은 열차가 궤도를 바꾸어 주요 인물의 적의 집 앞으로 달려간다. 케이시 존스가 신명나게 흐르다가 적과 그의 가족이 악취에 경악한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야겠다며 소위 '닥터'라 불리는 트레이너의 집 문을 두드린다. 비장한 표정에서 드라마가 끝나고 전주가 애절한 '닥터 닥터'가 흘러나온다. 나는 이 두 장면을 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현대사회의 거물들 사이에서 적과 피아를 구분하지 않으며 온갖 합종연횡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런 장면들은 음악과 어울려서 이상하게도 웃음을 자아낸다. 적재적소에 음악을 사용하려 애쓴 그 노력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작년이었던가.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오는데 익숙한 멜로디가 귀를 때렸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간드러지는 여가수의 목소리였다. 아니 잠깐만, 이걸 리메이크해서 일일드라마의 엔딩주제가로 쓴단 말이야? 드라마 주제곡 때문에 현자타임이 오고 있었다. 당대의 시크함과 세련된 감성을 대변했던 윤상과 온갖 막장의 향연을 보여주는 일일드라마가 이렇게 접속하는 걸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지만 아직도 가끔은 생각하고 있다. 이건 적재적소에 음악을 사용하려 애쓴 노력이긴 하되 현자타임을 가져온 혼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니면 윤상을 듣고 자란 세대가 이미 일일드라마 주 시청자층에 들어갔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작권자인 윤상은 도대체 어떻게 설득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요새 공중파 방송국들은 적자폭도 크고 기껏 거둔 이익도 아주 적은 편이라고 한다. 일일드라마나 소위 주말드라마 주제곡에 나름 돈을 들일 형편은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대신 익숙한 노래를 리메이크하거나 그대로 사와서 비용을 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만 해도 우리 집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주 좋아하는 <야래향>도 그렇고(나도 좋아한다), 스티비 원더의 A Place in the Sun이 나오는 걸 듣고서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새로 노래를 만드는 것보다 저작권료가 싼 걸까???). 하지만 어떤 명곡도 가족들이 온갖 막장을 재현하며 지지고볶는 한국형 일일/주말드라마에 접속하면 이상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일드라마는 보통 시청자들이 작가보다 더 줄거리를 잘 아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예측한 대로 흘러간다. 그리고 결말은 모두 웃으며 화해하고 가족애를 다지는 것으로 끝난다. 줄거리를 알고 결말을 다 아는데 명곡이 무슨 소용인가. 

A Place in the Sun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드라마는 2004년 다케노우치 유타카가 주연했던 <인간의 증명>이었다. 한 살인사건과 미군의 주둔 때문에 상처입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얽히는 가운데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면을 사람들은 보게 된다. 풀리지 않는 살인사건과 주요 인물들의 가족의 비극이 얽히는 45분이 지나고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이야기와 정 반대 지점을 상징한다.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노골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바로 그것, 눈부신 태양이 비추는 듯한 밝고 아름다운 인생 또는 백일하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시청자들은 바로 그 지점에 나도 모르게 동의하며 빨려들어간다. 많은 삽입곡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며 드라마의 온갖 장면에 끼워넣어지지만 제구실을 하는 곡들을 만나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 이유는 대체로 음악 탓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