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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나는 닥터헬리에 탑승하는 의사들만이 애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었다. 

의사를 보조하는 탑승 간호사.

헬기를 운항하는 기장과 정비사, 운항관리 담당자.

현장에서 환자에 대응하는 구급대.

착륙 현장의 안전을 지키는 소방대.

닥터헬리와 구급대, 소방대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소방본부.

의사와 간호사, 기사 들이 환자를 받을 준비를 하는 많은 병원.

그 과정을 떠받치는 간호조무사와 사무직원 들.

비행 중인 닥터헬리의 안전을 확인하는 관제사.

헬기를 늘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정비하는 여러 스태프.

소방대와 응급센터가 원활하게 연계되도록 일요일도 반납하고 응급구조 훈련을 하는 사람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힘을 합하면 매우 큰 일을 할 수 있다.

동료를 믿고 마지막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 

닥터헬리는 그 숭엄함을 가르쳐주었다." ('마치며'에서)

 

일반인이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일본의 닥터헬리 관련 서적은 몇 권이 있지만 이 책은 어린이용(초등학생)으로 나온 '고단샤 파랑새문고' 가운데 한 권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과연 어린이들에게 닥터헬리의 활약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주고 있나 무척 궁금해서 읽어보았다. 

 

이 책에 나오는 구명구급센터(응급센터)는 이국종 선생님의 <골든아워>에도 몇 번 등장하는 일본의과대학 지바호쿠소병원 구명구급센터이다. 인기 있었던 일드 <코드블루>에도 등장하며 드라마 의학감수도 당시 센터장이셨던 마시코 구니히로 선생님과 이 센터의 선생님들에게 받았다(마시코 선생님은 이 책에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한다).

 

아동서라 닥터헬리는 어떤 역할을 하는 헬기이고 의사들은 이 헬기를 타고 어떻게 환자를 처치하며 데리고 오는가라는 부분만 중점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을까 했는데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 책을 읽으면 지바호쿠소병원 구명구급센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결과로서 '사람을 구하는가'가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지는 것이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나는 뭔가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이제 막 닥터헬리에 탑승하기 시작한 '신조 선생님'이라는 젊은 의사가 첫 출동 당번을 맡은 날, 출동 연락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가장 먼저 향했던 곳은 운항관리실이다. 운항관리 담당자는 환자가 발생한 현장의 구급대가 건 직통 전화(핫라인), 헬기와 교신, 소방본부 연락, 헬기 기장과의 전용회선, 병원 내선전화, 의사들로부터 받는 전화 등을 모두 관리하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전화 다섯 대, 무선 두 대, 컴퓨터 세 대가 필요하다. 핫라인이 울린 순간 환자가 어디에 있고 구급대가 어떻게 움직이고 닥터헬리가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지 모두 조정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출동하는 의사는 구급차가 도착하는 출입구에서 헬리포트로 향하는데 그 거리는 직선 75미터이다...

 

어떻게 보면 지엽적이라 할 수 있는 정보를 적는 이유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이런 정보를 일반인이 쉽게 접근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온라인 서점에서 '닥터헬기'나 '응급구조' 키워드를 쳐보면 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집 기둥뿌리는 썩어 흔들리는데 잘되는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가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닥터헬리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뜰 수 있는가. 닥터헬리는 출동 요청을 받은 지 몇 분 만에 뜨는가. 닥터헬리 안에는 무슨 장비가 있는가. 닥터헬리에는 누가 타는가. 닥터헬리는 어디에 착륙하는가. 착륙에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고 그 조건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기장과 정비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닥터헬리는 반드시 거점 병원에만 환자를 이송하는가 등등... 그렇게 해서 신조 선생님과 구명구급센터 스태프들의 닥터헬리 출동ㅡ현장 처치ㅡ환자 이송의 과정을 챕터별로 반복해 읽다 보면 닥터헬리를 이용하는 일본 응급구조체계의 '뼈대'를 익히게 된다. 아동용 서적이라 하기 힘든 정보량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끔 적절한 문체와 에피소드들로 잘 소화시켜 만든 정말 훌륭한 책이다. 

 

위에도 인용했듯이 닥터헬리가 한 번 출동하는 데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 하나를 살리려면 '온 사회'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골든아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의료진은 병원 내에서 치이고 과로가 일상이라 몸이 망가지고 정부가 지원해서 외상센터를 곳곳에 만들기는 했으나 그걸 또 예산 빼먹기로 이용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있다. 이국종 선생님네 외상센터에는 닥터헬기 도입이 늦어지고 소방헬기를 겨우겨우 이용하고는 있으나 내려앉는 게 시끄럽다는 민원이 있으며 있던 헬리포트마저 싹 사라지게 만드는 그 민원을 조정해주어야 할 '본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병원 내에서부터 관료들과 정치계에 이르기까지 온 사회에 나름 힘 있고 이름 있는 세력들이 불협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결과적으로 방해를 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닥터헬리에 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접근하는 '아이들용' 책과 이 사회에서 닥터헬리에 관해 진지하게 접근하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일반인용' 책이 담고 있는 내용 사이의 괴리가 이렇게 크다. 이 책에서든 드라마에서든 닥터헬리가 학교 운동장에 착륙하는 장면이 나온다. 헬기가 착륙하기 전 전봇대는 없는지, 축구 골대에 부딪히지 않을지 세심히 점검한다. 뒤이어 소방대가 도착해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물을 뿌리고 포인트 지점에 착륙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아이들은 이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실제로 아이들은 닥터헬리 착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시끄럽고 수업에 방해된다고 생각할까? 

 

지바 현에 닥터헬리 출동 횟수가 늘어나면서 아이들은 이제 '헬기가 사람을 구하러 온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게 결코 특별한 일로 취급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 지도 벌써 10여 년이 되어간다. 정확히 10년 전, <중증외상, 어떻게 살릴 것인가>라는 다큐가 방영되었다. 현실은? 내가 보기에는 그 다큐에서 지적한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2017년 말에 방영되었던 <그것이 알고 싶다> 외상센터편에서도 의료진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사고를 만나 크게 다쳤을 때 내가 살아남는 건 순전히 운이 좋아야 하는 것 같다고. 그것도 몇몇 이들의 처절한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운. 

 

2019.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