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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헤이세이 시대, 그중에서도 특히 헤이세이 7년(1995년)은 한국에도 충격을 주었던 커다란 재난과 사건들이 연이은 해였다. 연초인 1월 17일 한신아와지대지진(고베대지진)이 있었고, 3월 20일에는 옴진리교가 사린가스로 지하철 테러를 저지른다. 그리고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옴진리교의 지하철 테러가 있은 지 열흘 후, 경찰의 수장인 경찰청 장관이 자택에서 출근을 하다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이는 헤이세이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불리는 사건으로서 결국 범인이 잡히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몸에 네 발의 총알을 맞았고 동맥까지 손상되어 위중한 상태였던 경찰청 장관은 즉시 앰뷸런스로 일본의과대학 고도구명구급센터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는다. 이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골든아워>에 등장하는, 이후 일본의과대학 지바호쿠소병원 구명구급센터장이 되는 마시코 구니히로이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생사의 기로에 섰던 장관은 순조롭게 회복하여  달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장관은 마시코 선생에게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때 마시코 선생의 답변은 이러했다고 한다.

 

"장관님은 도쿄에 계셔서 사셨습니다. 지방에 계셨다면 생명을 구하지 못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지방의 구급의료를 다시 살리려면 닥터헬리가 효과적입니다. 추진에 협력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이라는 소설로 한국에도 알려진 의사이자 작가 가이도 다케루는 한 뉴스전문 채널로부터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재량을 주겠으니 의료 관련 프로그램을 맡아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는 일본의 의료에 공헌하고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그 프로그램에 불러 자유롭게 대담을 나눈다. 그리고 이를 정리해 세 권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이 시리즈 중 가장 첫 권의 첫 편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위의 경찰청 전 장관이자 현재 구급헬기네트워크(HEM-NET)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니마쓰 다카지이다. 

 

구니마쓰 전 장관은 1999년 경제기획청(현 내각부)의 인증을 받아 NPO법인 구급헬기네트워크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한다. 이 법인은 닥터헬리를 홍보하는 한편 닥터헬리의 유용성을 조사 연구하여 그 자료를 가지고 국회의원 등 권한이 있는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오랫동안 관료로 일했기 때문에 어디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해야 닥터헬리 보급에 도움이 될지 알고 있었으며 HEM-NET 활동을 기반으로 '닥터헬리 특별조치법'을 성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저는 오랫동안 행정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으므로 어디에 힘을 미치고, 어디와 어디를 연결하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가에 관한 감 같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이 활동에 참여하면서 닥터헬리는 일본에 꼭 필요한 인프라임을 확신했습니다. 일본에 지금까지 없었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므로 제도설계자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실현되지 않습니다."(구니마쓰)

 

가이도 다케루는 닥터헬리 보급과 관련하여 구니마쓰 전 장관의 역할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의료계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다. 이게 좀처럼 해결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의료 현장에서의 문제와 그 해결방법을 행정이나 입법에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이 채널을 잇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서포터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HEM-NET은 구니마쓰 전 장관이라는 매우 강력한 서포터를 얻은 것이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이는 '전 고위 관료의 연줄'을 이용한다는 식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줄'을 동원한다고 해도 제안을 받는 사람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연줄'과 '이익'을 넘어서게 해주는 것이 일종의 대의, 즉 '공공의 안녕과 이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고위 관료가 자신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는(그는 헬기가 아니라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닥터헬리 보급 활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정치와 행정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여 '닥터헬리 특별조치법'의 성립까지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도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도 여러 정치가와 행정 관료들이 닥터헬기의 보급을 위해 애썼을 텐데 그게 국민들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죽도록 고생하다가 큰 이슈가 있을 때만 반짝뉴스처럼 그들의 고생이 부각되는가. 그 이유는 현장과 행정, 입법을 잇는 '채널'이 정말 없기 때문일까? 구니마쓰 전 장관과 같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서포터가 있기만 하면 닥터헬기 홍보와 보급이 좀더 순조로워질까?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상을 입었을 때는 의사가 헬기에 직접 타고 환자를 이송하러 온다'는 것이 어딘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의료 행위라는 사실은 아직 변함없는 것 같다.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구니마쓰 전 장관이 닥터헬리 보급에 무엇이 가장 중요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참조해보면 좋을 듯하다. 

 

"닥터헬리의 유용성은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운항하고자 하는 단계에 이르면 다양한 의도와 이해가 착종하여 진전을 어렵게 만들어왔다. 

끈질긴 설득 공작과 홍보활동. 이것이 지금까지를 돌이켜볼 때 닥터헬리 보급활동의 핵심이었음을 통감한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가이도 다케루 <일본의 의료, 이 사람을 보라(가이도라보 vol.1)> php신서 2012.